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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기

스물하고도 넷

 

  2011년 10월 15일 정오경.

  아침나절, 비몽사몽 살풋 눈이 떠졌을 때부터 여태껏 나의 자그만 방은 온통 비오는 소리로 가득 찼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이 내린다. 나는 스물 세 해 전 오늘, 자정이 막 지난 시각 세상에 났다. 오랜만의 비가 내린다. 하룻밤 사이 날은 꽤나 쌀쌀해졌다. 겨울이 오는 소리가 온종일 나를 가득 채운다. 나는 자랐고, 자라고 있고, 앞으로도 자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살아내는 일은 날이 갈수록 어렵고 또 버거워지면서도 요령과 용기, 감히 말하건대 지혜도 그만큼 생겨나고 있다. 그러니 아직은 살만하다. 다만 내가 두려운 것은 - 아직 오지 않은, 미처 겪어보지 못한 또다른 어려움이 아니라 - 내가 요령이라 용기라, 또 지혜라 믿었던 것들이 실은 비겁함과 어리석음, 아집에 지나지 않을까봐서. 나는 다만 그것이 두렵다, 그럼에도 깨닫질 못할까봐서. 나의 비겁함과 어리석음, 아집을 잘못된 것이라 깨우쳐 줄 나의 사랑하는 이들을 믿을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힘들다, 버겁다, 어렵다, 괴롭다 울며 징징대고 투정부리는 일만 일삼아온 내게 이들이 있다는 것은 실로 감사한 일이다. 감사하다. 내 곁에 있어주어, 남아주어, 투정만 부릴 줄 아는 철없고 고집 센 나를 받아주어 고맙다. 내가 그른 길을 갈 때 그르다 일러주고, 힘든 길을 갈 때 기운을 북돋아주고, 분노나 슬픔 같이 나를 좀먹는 감정들에 못이겨 할 때 말없이 나를 다독여주어 진심으로 고맙다. 나의 온 진정을 다해, 사랑한다.

 

  나는 복이 많은 사람이다. 어렵고 힘에 부쳐 절로 눈물이 나 그만 주저앉고 싶었던 순간은 수없이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모든 것은 다 내 부족에서 비롯된 것들뿐이었다. 세상에는 그 어느 것도 쉬운 것이 없고 그건 세상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마찬가지다. 이 당연한 사실을 여태 모른 체 하며 나에게만 어려운 것이라, 내게는 특별히 더 어려운 것이라 투정을 부리고 화를 내고 급기야는 포기해버리는 일을 수없이 반복하며 살았다. 그럼에도 떳떳했다. 나는 내가 여기저기서 주워섬긴 변명거리들로 공고한 벽을 쌓아두곤 이 방식이 내 자신을 위한 유일한 방식이라 합리화하며 스스로를 토닥이는 일을 일삼았다. 그러나 더이상 이렇게는 아니 된다. 삶의 관성은 여즉도, 또 앞으로도 나를 떠밀 테지만 - 그러나 이제라도 이렇게는 아니 된다.

 

  시월의 한중간에, 가을의 한중간에 나는 태어났었다. 그날은 해가 쨍쨍했을런지 모르겠다만 꼬박 스물 세 해가 지난 오늘은 천둥이며 번개가 우르르 쾅쾅 징그럽게도 울려댄다. 나를 울려댄다. 머리털이 나고 내 기억에 남은 매해의 오늘 중 단연코 가장 유난스런 날이라 확신한다. 타성에 젖어 발전이 없는 자신을 수없이 나무라면서도, 그 타성에 담뿍 젖어 헤어나올 길이 없던 자신은 모른 체 하고 싶었던 그 말만 좋은 이기는 아직도 내 전부다. 교만하고 나태한 자유주의자.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 내 본성일지도. 마음이 아프다. 자기 자신을 아는 일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가장 어렵다.

 

  언제나 한결같은 이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나 발전이 없는 이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결단코 별개의 이야기다. 기어코, 이겨내야 한다. 불을 켜지 않은 방 안은 겨울이 오는 소리로만 가득하다. 겨울이 왔다. 정오의 창은 자정의 창만 같다. 이 방 안에서 나갈 용기가 생기질 않는다. 그러나 이대로 침잠하고 싶지는 않다. 세상에 존재하도록 해주신 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고, 삶은 충만히 살아내고픈 욕구를 자극하는 그 무엇들로 가득하다. 감사한 하루다. 이 모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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