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안 읽힌다. 손가락 끝 마디마디에서 열이 나는 느낌이다. 활자를 좇아 한참을 굴러가던 눈알도 다시 또 제자리다. 제자리인 줄도 모르고 다시 또 활자를 좇아 한참을 구른다. 눈알이 아무리 굴러도 굳게 굳은 뇌는 굴러갈 생각이 없다. 내 머리는 지금 이 꺼먼 점들에 관심이 없다, 허연 것은 종이요 꺼먼 것은 활자라는 것만 인지할뿐 다른 곳으로만 맹렬히 구르고 있다 - 답도 없이 허공에 흩어지고야 말 허황된 바램으로. 가끔씩 앓고 지나가는 그 허황된 열병을 다시 앓고 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지난 줄도 모르고 지날 테다. 지나고 나면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 찾아오는 그허황된 열병을 앓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앓지 않을 이유도 없다, 기꺼이 앓으며 혹 나을까 벌벌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