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담기

그믐

그믐을 읽었다. 표백을 시작으로 네 번째 장강명이다. 권희철 평론가의 심사평처럼, 그는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이름으로 세밀한 글을 쓴다. 오랜만의 이틀 휴일 사이 - 새벽 세 시에 책을 덮고 불을 켰다. 생각들은 순간에만 머문다는 것을 알기에 그 순간을 기록으로라도 남겨야 했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이 책을 산지는 좀 되었다. 산지 얼마 안 되어 문학동네 팟캐스트를 들었고, 정말 좋았지만 왜인지 다 읽어버린 기분이었다. 그러다 어제 잠이 안 와 들여다본 책장에 이 책이 가장 얇아뵀다. 솔직히 그래서 집어들었고, 덕분에 완독했다.


내가 아까 우리 중에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죠? 그런데 현재를 제대로 보는 사람도 많지 않아요. 사람이 과거에 사로잡혀 있거나 미래에 홀려 있으면 현재를 제대로 보지 못해요. - 54p

도대체 나는 왜 태어났을까. 내가 호치키스 같은 거라도 하나 발명하면 세상에 태어난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난 그런 것도 발명하지 못하잖아. 그냥 학습만화 말풍선의 위치를 잡고 오자를 교정하는 사람이잖아. 인류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내가 있어서 조금이라도 삶이 나아진 사람이 있을까. 난 그냥 일벌 한 마리인 거야. 여왕벌을 위해 나무를 돌아다니며 열심히 꿀을 따지. 나 같은 게 천 마리, 만 마리, 십만 마리가 더 있어. 다른 일벌한테, 아니면 여왕벌한테, 내가 무슨 의미일까. 아니, 내가 하는 일이 일벌이 따오는 꿀 한두 방울의 가치라도 있는 걸까? - 82p

그런데 어떤 관계의 의미가 그 끝에 달려있는 거라면, 안 좋게 끝날 관계는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 끝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과정이 아름답고 행복하다 하더라도? - 87p

그냥 이거 쓴 누나가, 부모님한테 되게 사랑받는 사람인 거 같아. 사랑 없는 집이라는 게 어떤 건지 모르는 거 같아. (중략) 그리고 알코올중독자는 이렇게 이십사 시간 사나운 상태로 있지 않아. 술 깨 있을 때는 온순해. 남자아이가 말했다. - 94p

난 내 이름이 너무 특이해서 싫었어. 일단, 어렸을 때부터 이름을 불러주면 상대방이 그걸 제대로 받아적을 때가 없었어. 주로 '강'자를 '광'자로 알아들었지. 한강 할 때 강입니다, 라고 매번 알려줘야 했어. 전화할 때에는 특히. 그래서 좀더 평범한 이름, 누구나 들으면 이게 이름이구나 하고 아는 이름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어렸을 때부터 있었어. - 96p

아이는 거침이 없었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해도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해줄 거라는 자신이 있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 117p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 148p

 
문장이 위안이 되는 밤. 수상 소감까지도.

제가 소설을 쓰는 첫 번째 이유가 돈인 것은 아닙니다. 세번째 이유쯤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인생을 걸고 어떤 일을 할 때, 세번째 이유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이하 생략)

'- 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 번째 살인  (0) 2018.01.04
생각할 지점  (0) 2015.12.03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  (0) 2015.11.15
이야기 자판기  (0) 2015.11.13
마크 로스코 - 반이정 평론가 리뷰  (0) 2015.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