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세 번째 살인> 보았다.
우리는 늘상 스스로를 폄하한다. 물론 스스로에의 애정이 솟구치는 이들도 많지만, 그런 사람들조차도 어떤 순간에는 스스로가 회색 먼지 같단 생각을 했을 거다. 회색 니트의 보푸라기, 증정용 수건의 뭉친 먼지, 겨울 부츠에 달라붙은 검딱지 같은 나를.
하지만 그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씩씩하게 오늘을 맞이하는 것은 언제고 다음 순간 한번쯤은 빛났던 기억 때문이겠지. 노을빛 강가에 내리쬐는 반짝임, 흰눈이 나리는 가로등 불빛의 눈부심, 나를 바라보는 이의 애정 어린 눈망울, 따뜻한 햇살 아래 흩어지던 웃음들.
불행과 행운의 양이 결코 공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불행이 지난 언젠가는 반드시 행운이 찾아온다는 믿음이 우리를 버티고, 일으키고, 나아가게 한다.
그러나.
경험에서만 우러르는 그 믿음은 언제고 허약해지고 희미해지는 것이어서 - 매순간 되새기지 않으면 곧잘 잊혀진다. 그리하여 우리의 폄하는 반복된다. 반복되며 깊어지다 내면에 굳게 자리잡는다. 기어코 불행이 행운을 이기고, 우리는 불행 그 자체가 된다.
세 번째 살인이 성공하기까지 - 그는 얼마나 치밀했는가. 절도를, 살인을, 증오를, 애정을, 죄책감을, 그리하여 얻어질 용서를 정확히 직시하고 판단하여 행동하는 것. 그릇에 담긴 것은 어쩌면 증오일지도 애정일지도 죄책감일지도 혹은 스스로에 대한 지극한 연민일지도 모르겠다. 자기 연민이 주는 안락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마주하는 것.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죄인이 자신의 죄를 마주하지 못한다는 그 수없는 말들에도 불구하고, 미스미는 알고 있었다. 30년 전부터 마주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자기 연민에도 불구하고 더욱 연민해야 했던 존재, 아버지의 부재 가운데 홀로 자라야 했던 딸이 있었기에 더욱.
부모라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갖게 된다 믿어지는 그 연민조차도 갖춰지지 않은 이들이 많다. 사키에의 아버지가 그랬듯. 그들을 응징하는 자는 응당 법질서여야만 한다. 그러나 법치국가의 법질서에는 연민과 분노가 없기에 진실 또한 그 값어치를 다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테이큰>의 리암 니슨 같은 절대강자에게 환호하는 거겠지. 연민하고 분노하며 악을 징벌하는 자에 열광한다. 징벌로 인한 죄지음을 가린다.
그러나 죄지음을 사하는 자는 누구이며 죄지음을 징벌하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결국 그 마지막 단계에는 늘 스스로가 있을 뿐이다. 스스로에의 일상적인 폄하와 연민을 넘어 제 마음속 도덕법칙을 마주하는 것.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은 증오나 연민으로 그릇을 채운 자도, 그마저도 없이 텅 빈 그릇을 가진 자도 아니다. 그릇조차 지니지 못한 자, 때문에 스스로의 도덕법칙을 직시하지 않는 자. 그런데도 미스미가 정녕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던가?
불빛에 반사된 볼과 햇빛에 반사된 볼의 색이 같듯이, 핏자국과 햇살자욱을 닦아내는 손의 움직임이 다를 바 없듯이 그 크기와 양상이 다를 뿐 누구에게든 원죄는 존재한다. 그렇기에 나 역시 영화가 끝난 후 조용히 내 볼을 닦아내며 스스로를 마주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 모든 이들에게 정녕 죄없이 떳떳할 수 있는가.
우리는 늘상 스스로를 폄하한다. 물론 스스로에의 애정이 솟구치는 이들도 많지만, 그런 사람들조차도 어떤 순간에는 스스로가 회색 먼지 같단 생각을 했을 거다. 회색 니트의 보푸라기, 증정용 수건의 뭉친 먼지, 겨울 부츠에 달라붙은 검딱지 같은 나를.
하지만 그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씩씩하게 오늘을 맞이하는 것은 언제고 다음 순간 한번쯤은 빛났던 기억 때문이겠지. 노을빛 강가에 내리쬐는 반짝임, 흰눈이 나리는 가로등 불빛의 눈부심, 나를 바라보는 이의 애정 어린 눈망울, 따뜻한 햇살 아래 흩어지던 웃음들.
불행과 행운의 양이 결코 공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불행이 지난 언젠가는 반드시 행운이 찾아온다는 믿음이 우리를 버티고, 일으키고, 나아가게 한다.
그러나.
경험에서만 우러르는 그 믿음은 언제고 허약해지고 희미해지는 것이어서 - 매순간 되새기지 않으면 곧잘 잊혀진다. 그리하여 우리의 폄하는 반복된다. 반복되며 깊어지다 내면에 굳게 자리잡는다. 기어코 불행이 행운을 이기고, 우리는 불행 그 자체가 된다.
세 번째 살인이 성공하기까지 - 그는 얼마나 치밀했는가. 절도를, 살인을, 증오를, 애정을, 죄책감을, 그리하여 얻어질 용서를 정확히 직시하고 판단하여 행동하는 것. 그릇에 담긴 것은 어쩌면 증오일지도 애정일지도 죄책감일지도 혹은 스스로에 대한 지극한 연민일지도 모르겠다. 자기 연민이 주는 안락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마주하는 것.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죄인이 자신의 죄를 마주하지 못한다는 그 수없는 말들에도 불구하고, 미스미는 알고 있었다. 30년 전부터 마주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자기 연민에도 불구하고 더욱 연민해야 했던 존재, 아버지의 부재 가운데 홀로 자라야 했던 딸이 있었기에 더욱.
부모라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갖게 된다 믿어지는 그 연민조차도 갖춰지지 않은 이들이 많다. 사키에의 아버지가 그랬듯. 그들을 응징하는 자는 응당 법질서여야만 한다. 그러나 법치국가의 법질서에는 연민과 분노가 없기에 진실 또한 그 값어치를 다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테이큰>의 리암 니슨 같은 절대강자에게 환호하는 거겠지. 연민하고 분노하며 악을 징벌하는 자에 열광한다. 징벌로 인한 죄지음을 가린다.
그러나 죄지음을 사하는 자는 누구이며 죄지음을 징벌하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결국 그 마지막 단계에는 늘 스스로가 있을 뿐이다. 스스로에의 일상적인 폄하와 연민을 넘어 제 마음속 도덕법칙을 마주하는 것.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은 증오나 연민으로 그릇을 채운 자도, 그마저도 없이 텅 빈 그릇을 가진 자도 아니다. 그릇조차 지니지 못한 자, 때문에 스스로의 도덕법칙을 직시하지 않는 자. 그런데도 미스미가 정녕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던가?
불빛에 반사된 볼과 햇빛에 반사된 볼의 색이 같듯이, 핏자국과 햇살자욱을 닦아내는 손의 움직임이 다를 바 없듯이 그 크기와 양상이 다를 뿐 누구에게든 원죄는 존재한다. 그렇기에 나 역시 영화가 끝난 후 조용히 내 볼을 닦아내며 스스로를 마주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 모든 이들에게 정녕 죄없이 떳떳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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