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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기

캥거루

또 일찍 깼다. 초저녁에 잠들었다 깨고, 다시 잠들지 못하는 날의 연속이다. 커피를 생명수로 달게 되고, 또다시 잠들지 못하는 악순환.

이사를 오며 유일하게 맘에 들었던 부분이 집 근처에 영화관이 있단 거였다. 걸어서 10분 거리. 어릴 적부터 꿈꾸던 로망이었다. 일어나 모자만 쓰고 나가 보는 주말의 조조라든가, 막차 시간 따위 상관없이 내키면 지르는 평일의 심야 영화 등등.

고등학교 때, 토요일 밤 학원 수업이 끝나고 심야 영화를 자주 봤었다. 2시의 독서실 차를 믿어서기도 했지만, 거의 항상 아빠가 극장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영화가 어땠는지 종알거리며 아빠와 함께 집에 오던 길, 주차하고 갈테니 먼저 올라가라는 말씀에도 꼭 아빠와 함께 내려 걷던 주차장 입구, 불꺼진 거실에서 새벽까지 우리 부녀를 기다리고 계시던 엄마와 배고프다고 그 시간에 기어이 요거트라도 꺼내먹던 새벽.

이제는 코앞이 영화관인데도 예전만큼 심야영화가 즐겁지 않다. 극장 앞에서 날 기다리고 계신 아빠도, 집에서 날 기다리고 계신 엄마도 지금은 여기 없으니까. 영화가 끝나고 혼자 집까지 걸어오는 길은 쓸쓸하고, 영화가 어땠는지 조잘댈 사람이 없어 외롭다.

실은 며칠 전 엄마와 다퉜다. 엄마 전화에 깜박하고 콜백을 하지 않아서였지만, 나는 그 이유가 친척모임에 있었다는 걸 안다. 평소라면 그저 서운하다고 하셨을 엄마가 내게 화를 내셨으니까. 엄마는 내가 캥거루라고 했다. 엄마 배 주머니에서 나갈 생각을 않는 캥거루. 나는 그 말이 퍽 서럽고 서운했지만 차마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날 집에 오는 길은 유난히 지쳤다. 추웠고, 쓸쓸했고, 외로웠다. 그리고 엄마의 어제 저녁도 이랬으리라 짐작했다. 멀리 보이는 극장 표지판을 보며 10여년 전을 생각했다. 같은 표지판을 단 그 극장을, 그러나 전혀 다른 느낌의 지금을. 영화를 보는 일은 언제나 내 큰 위안이었는데, 그날만은 이제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왔다. 최대한 힘차게 발을 쿵쿵 굴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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