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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기

두려움



완전히 다른 타인과의 만남은 모험이다.

완전히 다른 타인에게 거는 기대는 도박에 거는 판돈과 같고, 그래서 완전히 다른 타인에의 신뢰는 용기를 전제로 한다.

 

 

나는 겁이 많다. 나의 의지로 공포영화를 본 적도 물론 없고,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것도 아주 싫어하며, 귀신만큼 사람을 두려워한다. 어렸을 적부터 겁이 많아 에스컬레이터도 쉬 타질 못했고, 혼자 잠들지도 못했으며, 엄마와 떨어질 때면 경기를 하듯 울어댔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마다 한 템포의 용기를 필요로 하며 혼자 잠드는 밤은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해가 뜨길 기다린다.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타인에게 마음을 열 때의 나는, 늘 망설이고, 상대를 이리저리 재며, 첫인상과 말투, 행동거지와 사소한 버릇까지 예민하게 기억했다. 물론 이러한 두려움은 겁이나 무서움과는 조금 다른 종류지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라는 점에서는 같았다.

 

 

나는 사람을 많이 가린다. 낯을 가린다기보단, 편한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많이 가린다는 의미다. 벽이 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뜻밖에도 퍽 친했던 이들에게서.

그러니까 그들의 논지는, 내 마음에는 두개의 벽이 있어서, 바깥의 벽은 담이 매우 낮고 허술해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친근하게 느껴지지만 그 안의 벽은 너무나 높고 단단해 누구에게도 잘 열어주지 않는다는 거였다. 나는 그 누구의 연락도 반갑게 받으며 그 누구에게도 먼저 웃으며 인사하고 그 누구의 농도 친근하게 받으나 - 왜인지 내게는 분명한 선이 느껴진다고 했다. 어느 이상은 안돼, 딱 여기까지야 하는.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들은 언제나 내게는 퍽 친근하고 좋은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단언코 부러 선을 그은 적이 없던 이들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나의 어떤 면이 그렇게 느껴졌을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그게 바로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라는 결론을 냈다. 내 마음에는 타인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벽이 있어서 나조차도 그 벽을 뚫을 수가 없는 게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사랑하지만 스스로를 믿지 않고, 스스로를 믿지 않는 나를 잘 알기에 그 두려움의 벽을 견고하게 쌓았던 게다.

 


이런 내가 사랑을 할 수 있을 리 없다. 사랑이라니, 타인에 대한 완전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그것이라니. 신뢰가 클수록 두려움은 더 커지는 법이고, 그 큰 두려움을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 믿었다. 내 연인을 완전히 신뢰하던 시기도 물론 있었다만, 이제는 글쎄. 그것은 환상이었노라고 고백한다. 믿었던 많은 것들이 다 부스러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것들을 믿어야 하는가. 

 

그러나, 환상이 다 부스러졌다 한들 내 사랑 또한 부스러진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리하여 질문은 또다시 바뀐다.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들을 떠나보낼 수 있는가? 수없는 고민 끝에 나는 결국 그럴 수는 없다 답한다. 그리고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렇다. 이것이 내게는 용기고, 믿음이고,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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