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15 02:57
봄이 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날짜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요즘 날씨는 전연 봄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의 쌀쌀함 뿐이었다. 봄의 한복판이어야 할 이 시점에 광주엔 경기마저 취소될 정도의 눈이 내렸대고, 서울도 너무나 쌀쌀맞은 바람에 어깨가 움츠러들 정도였다.
저녁을 먹고 나오던 차에 참살이길 벚꽃나무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게 새삼 눈에 들어왔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기는 커녕 휘잉 하는 겨울 바람이 나를 에워싸는데 그래도 벚꽃은 저혼자 느낀 봄에 활짝 피었다. 만개한 벚꽃나무가 가득한 길은 사람의 감정을 이상하게 만든다 - 소은이가 했던 말 그대로, 없던 감정도 어느 순간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느껴지게 한다.
메마른 이에게 가슴 시린 기억을 되살아나게도 할 테고, 외롭지 않은 이에게 눈물나도록 설운 외로움을 왈칵 안겨주기도 할 테다. 어제와 다를바 없는 일상에 미묘한 사랑의 감정이나 가슴 뛰는 설렘을 선사하는 일들이야 찬란한 봄의 꽃으로서 응당 해야할 일이겠지. 어떤 종류의 감정이든 어느 순간 아주 당연하게 -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게 될 거다.
나에게는,
나에게는 그 무엇도 해당사항은 없었지만 눈을 감았다 뜨자 어느새 복잡한 감정 하나가 똑 하니 생겨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지만 혼자였고 슬프지 않았지만 슬펐고 더이상 어리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리다고 생각됐다. 복잡함 속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 건 미칠듯이 어리다는 느낌이었다. 무슨 말을 주절거리기엔 나는 너무나 어리고 또 어렸고 그래서 무슨 말이든 알맹이 없이 겉돌기만 했다.
그게 말뿐이면 좋았으련만.
생각은 겉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나의 시계는 멈춰있었지만 봄은 이미 와있었고, 그럼에도 내게는 시계를 돌릴 여력도 의지도 없다.
시계가 없이 시간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