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기

스스로에 대하여

정보미20 2013. 4. 7. 06:03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토요일 오후, 평소보다 축 가라앉은 열람실 분위기에 나까지 지레 착 가라앉았다. 자세히 듣고 있음 어찌나 부선스러운데도ㅡ, 책장 넘어가는 소리, 의자 덜컥이는 소리, 간혹 잰 기침 소리, 책을 탁탁 놓는 소리, 볼펜 따닥이는 소리, 바스락 연필 소리. 도로 안심이었다.

너무 고요한 열람실은 정이 안 간다. 적당히 부산스럽고 적당히 비어있는, 여러 소음들이 끊이질 않는. 그런 열람실 속에서는 그저 가만 앉았는 것만으로도 달뜬 마음이 어느새 폭 안정되곤 했다. 포근함. 그곳에 앉아 집중해 공부를 해본 기억은 거의 없다만, 항상 위로가 되어주었었다. 그 수많은, 쓸데없이(의미없이, 라고 적었다가 고쳤다) 지새웠던 밤들.

개강 이후 처음, 3시 넘어까지 잠들지 못하는 밤이다. 아마도 곧 해가 뜰 것 같다. 15층의 도심 한가운데 나의 집은 아직도 가끔씩 낯설다.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은 너무나 완벽하게 이중적인 도시라서일까. 길 하나가 얼마나 큰 차이를 나눌 수 있는지를 실감한다. 길 건너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즐비하나 그 건너에는 들썩한 재래 시장이 폭삭이고, 누군가에게는 돈놀음이며 한낱 종이 쪼가리이나 다른 이에게는 생의 터전이며 전부이고, 어떤 이에게는 그저 천편일률의 건물이며 길가이나 또 어떤 이에게는 일생을 상징하는 유의미려니. 그리하여 이곳이 후일의 나에게 어떤 존재로 남을 것인지를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요새 이전까지의 스스로가 얼마나 불성실했으며 대학이란 공간이 얼마나 스스로에게 가치 없게 느껴졌었는지를 새삼 깨닫고 있다. 나는 내 모교를 사랑하지만, 그는 미래보다는 과거와 더 가까웠다. 희망보다는 좌절과, 변화보다는 타성과, 이상보다는 현실과. 그러나 이 타성의 공간에서, 내게는 가장 큰 변화와 깨달음이 있었다. 많은 것들에 대하여. 인생과, 사랑과, 사람과, 희망과, 꿈과, 욕망과, 좌절과, 실패와, 성공과, 그리고 수많은 것들에 대한 관념을 새로이 정립할 수 있었다고, 감히 그렇게 느낀다.

물론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내 관념이며 자세, 마음가짐이 많이 변했다 여겨지다가도 사람은 결코 쉬 변하질 않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또 다시 되새기게 되곤 한다. 실은 쉬 변하질 못하는 스스로를 퍽 대견스러워 하는 나를 잘 알기에 '나는 결코 변하지 않겠다' 안도의 체념을 하는 것이다. 아마도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한 강박의 방어기제가 아닐런지. 기를 쓰며 너는 흘러도 나는 변하지 않는다 바득바득 우기고 싶은 것이리라. 허나 그것이 이미 변화의 반증임을. 실은 스스로가 얼마나 치졸하고 비겁한지, 명확히 느끼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기를 쓰고 꼿꼿해지려는 게 아닐까. 스스로에게도 결단코 내보이고 싶지 않은, 결코 스스로는 인정하지 못할. 그러나 기어이 마주보아야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