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기
관계에 대한 단상
정보미20
2010. 7. 7. 03:42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여러 관계에 대해 혈연 지연 학연 등 갖가지로 부르곤 하지만 결국 그 명명도 여러가지 관계들을 분류하려 애쓰는 시도의 일부일 뿐 어느 관계가 같은 종으로 묶여있어도 결코 같을 수는 없다는 걸 깨닫고 있다. 갑과 을, 갑과 병, 을과 병이 맺는 관계들은 주체와 배경이 같을지라도 그 내용마저 같을 수는 없다, 그 시작부터도 같을 수 없다. 무의식 중에 첫인상이 끼치는 무시못할 영향력 속에서 갑과 을의 만남과 갑과 병의 만남이 같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각각의 시작에서 출발해 진행되는 (혹은 이미 끝난 듯한) 관계들 속에서 우리는 울고 웃고 표현하기 힘든 여러가지 감정들을 지니며 살게 된다. 우연 또는 필연으로 맺어지는 인연들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매순간 끊임없이 관계의 지속을 위해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할는지 혹은 이쯤에서 그만두어야 할는지 고민하고 갈등한다. 어느 순간 이 모든 관계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다가도 바로 그 다음 순간 바로 그 모든 관계에 대한 미련으로 다시 한 번 붙들게 된다. 감정에 치우친 판단을 내리다가도 이성이 깃드는 순간부터 감정만을 좇을 수는 없는 게 바로 관계다. 갑과 을의 관계가 갑과 을의 감정뿐 아니라 상황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다. 그뿐인가. 갑과 을의 관계는 병의 감정과 상황에도 영향을 받고, 심지어 갑과 을을 둘러싼 그 모든 다른 이의 감정과 상황에도 영향을 받는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은 관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들어맞는 말이지만 감정만으로 움켜쥐기엔 너와 나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 너무 많다.
대부분의 우리는 관계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내게 좋은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것만도 아니고 내게 최악의 사람이지만 이익이 되는 사람을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어떻게든 '잘' 지내보려고 애쓰고 공을 들인다. 단지 점과 점으로 맺어진 관계 외에 크든 작든 한 무리 속에서 맺어진 관계가 더 힘들기도 (같은 이유로 더 편하기도)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갑이 을과 '잘' 지내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 을과의 관계뿐 아니라 병, 정 나아가 무리 전체와의 관계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사실 많은 이들이 관계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하는 원인의 대부분이지 않나 싶다.
친하고 친해지고 싶고 친해질 수 있는 사람들만 만난다면 그나마도 다행이련만 실상은 그렇지도 못하다. 얼굴도 마주치기 싫은 사람과 매일매일 얼굴을 마주해야 하고 너무나도 보고싶은 사람과 두번 다시 만나기도 힘든 게 현실이다. 사실 친하다는 말의 정의도 모호하다. 친하다는 말이 대하기에 편하다는 것인지 서로 많이 알고있다는 것인지, 얼추 정의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렇다면 그 기준은 어느 정도로 두어야할 것인지에 대한 견해도 모든 이가 서로 다를테다. 단지 좋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구분한다손 치더라도 - 어제의 좋은 사람이 오늘의 죽도록 싫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어제의 죽도록 싫은 이가 오늘의 가장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하니 구분하고 경계짓는 것도 다 무의미한 짓일지 모르겠지만 - 내게 좋은 사람과 네게 좋은 사람이 제각각이니 또 문제다. 내게 좋은 사람에게 나는 그닥 좋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고 심한 경우 최악의 사람으로 남겨질 수도 있다. 사실 이런 여러 면에서 관계란 결국 종잡을 수 없고 모호하고 나아가서 너무도 허무한 것일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우리는 관계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매일매일 다른 이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발전하든 악화되든 관계의 변화를 거치며 살아간다. 관계의 변화를 거치며 사람도 함께 변한다. 향후 인생을 결정짓는 큰 변화를 겪기도 하고 소소한 감정 변화를 겪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람은 배우고 성장한다. 관계에 의한 상처를 관계로 치유하기도 하고, 이전의 관계에 의해 오늘의 관계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살아가는데 있어 관계란 필수적인 것이며 그 모든 관계는 상호 의존적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했던가. 옷깃이라도 스친 인연으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울고 웃고 지지고 볶고 고민하고 갈등하기엔 스친 옷깃이 너무도 많다. 옷깃 스친 인연마저 모두 보듬기엔 내가 너무 힘에 부친다. 아주 견고해보이던 관계도 서로의 노력없이는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때부턴가 그저 옷깃만 스치고 지나가는 인연들로 가득차게 된 듯 하다. 이미 지속되고 있는 관계들을 유지하는 데만도 힘에 부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나가는 일이 시작부터 전에 두렵고 버거운 짓이 되어 버렸다.
관계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이미 끝난 것 같은 관계들도 잠시 멈춰있는 것뿐이다. 쌍방의 지속되는 노력과 시간이 있으면 -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장난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 결국 언젠가는 되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언젠가만 믿고 지금의 관계들, 그리고 시작하기 전인 지금의 인연들을 소홀히하기엔 지금의 모든 내 사람들이 아직 많이 소중하다. 처음부터 마음이 맞아 어울리게 되었던 인연도, 필연적으로 자주 어울려야 했기에 맺어지게 된 인연도, 아직 시작하진 않았지만 이대로 떠나보내기엔 스친 옷깃이 맘에 걸리는 인연도 모두 다 하나같이 소중하다. 시작부터 두렵고 버겁더라도 대가없는 노력은 없으니 다시 한 번 애써보는 게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